지리산둘레길 걷기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농촌봉사활동에 대한 이야기는 창원자유학교 영상 4편에서 확인해 주세요.
가장 많이 준비하고, 가장 뒷말이 많았던 여행입니다. 교사들의 여행에 대한 기대와, 여행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 학생들에게서 터져 나온 불만 사이의 그 거리가 창원자유학교의 진짜 여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리산둘레길을 다녀온 후 창원자유학교 교사들끼리 농담처럼 하던 진담이 있습니다. 지리산둘레길에서 겪었던 일,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며 보았던 학생들의 모습이 계속 반복된다! 첫 번째 여행, 여행사를 끼지 않고 교사들이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머릿속에서 그린 여행과 실제 여행은 분명히 다를 것이라는 걱정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여행 전문가를 만나 조언을 구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조언이나 구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은 학생들과 많은 여행을 다녀본 전문가의 눈에는 걱정거리였습니다. 3박4일 동안 내내 메고 다니고자 했던 배낭과 3박4일 동안 우리의 힘만으로 해결하려 했던 끼니와 매일매일 잠자리를 바꾸고자 했던 여행 코스는 허황된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과욕이었습니다. 3박4일, 걷는 것만으로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먹는 건 정말 잘 먹어야 한다. 숙소를 바꾸는 것보다 베이스캠프를 두는 것이 낫다. 욕심을 낼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욕심이 학생들에겐 엄청난 고통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결국 조언은 조력을 구하는 일이 되었고, 조력은 구하는 마음은 동행을 부탁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학교의 일이란 것이 모험보다는 안전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모험을 시도해야 했습니다. 첫 날부터 학생들의 저항(?)은 대단했습니다. 오늘까지만 걷겠다. 내일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걷지 않겠다. 전화기는 왜 걷느냐? 왜 이런 개고생을 해야 하느냐? 집에 가고 싶다. 분한 마음인지 억울한 마음인지 눈물까지 보이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그 어떤 험한 길을 걷는 것보다 학생들의 불평과 불만으로 듣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교사들도 처음 가 보는 길인데, 더구나 학생들끼리 책임지고 가야 하는 길인데……. 경험보다 나은 스승이 없다고 했던가요? 동행에서 아예 선두가 되어야 했던 길잡이(여행 전문가) 선생님의 역할이 컸습니다. 기꺼이 악역을 맡아주셨습니다. 길잡이 선생님와 회유와 협박(?)이 이어졌고, 갈등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다음 날은 기약할 수 있었습니다. 날씨도 얄궂었습니다. 비가 계속 왔습니다. 엄청 많은 비가 오는 날도 있었습니다. 4월초의 산길, 비까지 내리니 춥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 길들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비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첫 날부터 시작되어 지리산둘레기를 다 걷고 난 뒤에도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았던 학생들과 길과의 갈등, 학생들과 길잡이 선생님과의 갈등, 학생들과 우리 교사들과의 갈등(다행히 길잡이 선생님이 악역을 맡는 바람에 우리는 그나마 선한 역할을 할 수 있었고, 그 덕에 갈등이 덜하긴 했지만 학생들과 우리 교사들 사이에도 갈등이 없지는 않았습니다)에 마음이 계속 무거웠습니다. 게다가 저는 뒤처진 학생들을 끌고 가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더 이상 한걸음도 못 가겠다고 퍼져 앉아 버리고, 산속인데 택시를 부르라고 떼를 쓰고, 왜 이렇게 힘들게 걸어야 하냐고 욕설과 저주를 쏟아내는 말들과 함께 걸어야 했습니다. 그 중 제일 힘든 건 욕설과 저주의 말이었습니다. 힘든 건 알겠는데 정말 저렇게까지 듣기에 아픈 말을 해야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쩌면 길들이 저를 버티게 해주었습니다. 오늘 하루 걸어야 할 그 길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이 저를 버티게 해 주었습니다. 응석을 받아주기로 했고, 욕설과 저주도 받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뒤처진 학생들을 목적지까지 걷게 할 수 있다면 참아야 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때론 산길에서 벗어나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는 도로를 걷기도 했습니다. 절뚝거리며 걷는 학생을 뒤에서 밀기도 하고, 앞에서 끌기도 하면 걸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걷고 있지 않느냐며, 조금만 더 가면 되지 않겠느냐며 달래고 어르며 걸었습니다. 혼자 걷는 길이 몇 백 배는 편할 것 같습니다. 배낭 속에 넣어온 초콜릿을 나눠 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사탕을 나눠 줄 수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산속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진 못했지만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았습니다. 비를 맞아 몸이 식어버린 몸으로 뜨거운 라면 국물을 마실 수 있는 것도 좋았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좋았습니다. 어묵 국물도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여전히 저항하고 불평했지만 하루의 길을 걷고 나면 뿌듯해하는 학생들을 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베이스캠프가 된 숙소에서 먹는 밥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방에는 이불을 빼앗긴 채 학생들의 발밑에서 자도 잠이 들 수 있을 만큼의 온기가 있었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 코를 골기는 했지만 더 이상 불평과 불만의 말을 하지 않는 그 밤도 좋았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기억 하나를 정리하는 걸로 3박4일을 대신하겠습니다. 둘째 날인지 셋째 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날도 저는 두 명의 학생과 함께 본진과 뚝 떨어져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본진과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서 수시로 휴대전화를 길을 확인하며 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길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더 먼 길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게다가 두 명의 학생은 걸음도 느립니다. 한 명은 정말 발바닥이 아픈 것 같았습니다. 발바닥이 불이 난다는 표현이 딱 맞는 상황인 듯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의 발바닥이 몹시 아프다는 말을 할 뿐 자신을 걷게 만든 사람과 상황에 대한 저주의 말을 멈춘 것이었습니다. 아프다는 발을 어떻게든 해결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을 잘못든 건 거의 확실해 보였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가야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길을 내려가서 택시라도 탈 수 있는 길을 찾으면 다시 돌아오기로 하고 산을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길을 얼마쯤 내려가는데 산길 가장자리에 차가 한 대 서 있었습니다. 아, 도움을 받아야겠다. 근처에 사람 사는 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의 앞유리 아래에 차주의 번호가 있긴 했는데, 절묘하게 두 자리 정도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운이 나쁘면 100통 가까운 전화를 해야 차주와 연결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몇 통의 전화를 했습니다. 결번이었습니다. 그 사이 뒤따라오던 학생들도 제가 있는 곳에 다다랐습니다. 세 사람이서 잘 보이지 않는 전화번호를 어떻게든 읽어보려 했습니다. 세 사람이 역시 한 사람보다는 나았습니다. 한 자리의 숫자는 의견 통일이 됐습니다. 이제 확률은 1/10입니다. 세 통인가, 네 통인가 전화를 했는데 연결이 됐습니다. 무턱대고 차가 다니는 길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10분 정도만 기다리라고 합니다. 10분 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실 만한 분이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5km 이상의 산길을 달려 큰길에 우리를 내려주셨습니다. 정말 산에 사는 산신령을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억하려 하면 더 많은 기억이 날 겁니다. 하지만 기억들을 학생들이 모두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다시 얘기하는 날이 있겠지요. 이쯤에서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길을 걸었습니다. 목적지가 중요했을까요? 목적지에 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했을까요? 목적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가 중요했을까요? 아닙니다. 길이 끝나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그 다음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걸어야만 했습니다. 겉으로 욕을 하거나 속으로 욕을 하면서라도 걸어야 했습니다. 걷는 것이 전부였던 길, 걷는 것이 전부였던 시간이었습니다. 창원자유학교의 1년도 그 길과 닮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창원자유학교에서 1년을 보내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보다 어쨌든 자신의 힘으로 1년을 꾸려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내 힘으로 걸어서 도착한 곳이 목적지가 되는 삶! 우리는 다시 떠나야 합니다. 지리산둘레길 걷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주 나중에 지리산둘레길에서 다시는 만나는 것도 저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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